본문 바로가기

lost in the light

노르웨이의 아주 추운 씨에스타, 독일 베를린/노르웨이에서 열흘 간

Winter Wonderland

2014 Dec 25 - 2015 Jan 3 

 

 

1년 동안 마드리드의 씨에스타가 끝났고 서울에 돌아와 맞이한 2010년의 가을은 바쁘기만 했다. 새로운 집단에 속해서 지금까지 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산다는 건 그렇게 바빠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깨어 있는 시간은 적었고, 깨어 있는 내내 몸과 마음이 바빴다. 누가 떠밀어 선택한 것도 아니면서 스페인에서 보낸 게으르고 느린 1년을 당장 메꿔야할 것처럼 바쁘게 지냈다.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은 척해야 했고 지기 싫다는 마음 때문에 타인의 욕심과 목표에 편승해서 나도 마치 같은 것을 원하는 것처럼 살았다.

 

그날 밤도 마음에 들기는 커녕 주저 앉아서 엉엉 울고 싶을 정도로 맞지 않는 팀원에 대한 스트레스, 그 사람이 맞지 않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내 탓으로 돌리는 데 대한 피로, 수면 부족, 찾아야 할 자료에 대한 압박 등으로 엉킨 마음으로 뜨거워진 랩탑을 붙잡고 밤을 샐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파리에 가고 싶어져서 구글링을 하다가 파리라고 하기엔 낯선 한 장의 사진을 보았다.

 

까만 밤이 내렸지만 곳곳에 하얀 눈이 뒤덮고 있었고, 낮은 불빛이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을 가득 메우고 있던 도시의 사진. 북극의 파리라고 불리는 트롬소의 사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대륙인 남극보다는 바다인 북극에 관심이 더 갔기 때문에 북극이라는 어감에 한 번, 파리에 한 번, 이렇게 마음이 끌렸고, 특히 오로라로 유명한 이 곳에 꼭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2014년 여름, 트롬소로 향하는 표를 끊었다. 노르웨이는 가기 쉬운 곳이 아니다. 정규로 편성된 직항 노선도 없는 데다가, 트롬소는 수도인 오슬로에서도 멀기만 하다. 완전히 다른 나라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짧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고 25일 새벽, 비행기를 탔다. 지금까지 타보지 않았던 항공사를 이용해보고 싶은 마음에 KLM을 타게 됐는데 암스테르담에서 오슬로를 바로 갈 수도 있었지만 우선 베를린으로 향했다.

 

나의 이런 점은, 가끔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기도 한데, 언제나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정하고 대책 마련에 힘쓰는 데 따른 것이다. 내가 그렇게 꿈꿔 온 트롬소가 혹시나 나와 너무 맞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지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니, 사실은 트롬소에 가서 극야 속에서 느릿느릿한 열흘을 모두 보내도 좋겠지만 딱 필요한 만큼만 트롬소를 위해 쓰고 나머지 일정을 다른 도시로 채워 넣은 것이다.

 

12/25 ~ 26 Berlin

27 ~ 29 Tromso (27일 아침 베를린에서 오슬로 이동 - 다시 오슬로에서 트롬소로 이동) 

30 ~ 31 Bergen (30일 아침 트롬소에서 베르겐 이동)

1/1 ~  3  Oslo (1일 아침 베르겐에서 오슬로 이동)

 

처음에는 노르웨이만 가려고 했는데 베를린을 가게 된 것은 마침 회사에서 맡고 있는 컨텐츠 관련 데모 영상을 베를린에서 찍어서 자주보다 보니 왠지 가고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르웨이에 비해 물가도 싸고, 크리스마스 마켓도 많이 열리니 가보고픈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IN/OUT을 정했는데 막상 트롬소를 가는 길이 참 멀었다. 베를린에서 트롬소를 가는 항공편을 알아보니 직항이 없어서 돌아가야 되는데 묶음표를 사는 것이 베를린 - 오슬로, 오슬로 - 트롬소 이렇게 따로 구간을 끊는 것보다 어쩐지 더 비쌌다. 그래서 Air Berlin을 타고 오슬로로 갔다가 1시간 정도 여유를 두고 SAS를 타고 트롬소로 가는 표를 각각 끊었다. 

 

유럽 내에서 도시 간 이동을 할 때 직항편이 없어서 환승을 하는 경우, 환승 시간 때문에 고민되는 경우가 많은데, 짐을 찾더라도 사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걸리진 않는다. 이미 입국 심사는 처음 도착한 유럽 국가에서 했기 때문에 심사 시간이 걸리지 않기 때문. 대신 시큐리티 검사는 하므로 만약 런던 히드로 공항이나 파리 샤를 드 골 공항같이 큰 공항을 이용하는 경우엔 환승 시간을 2시간은 잡아 놓는 게 좋다. 나는 오슬로에 내려서 짐을 찾고 입국장으로 나와서 다시 체크인을 하고 짐을 붙인 후 출발을 해야해서 1시간이라는 환승 시간이 너무 짧을까봐 걱정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입국 심사가 없었기 때문에 여유를 두고 트롬소 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트롬소에서 베르겐은 굉장히 멀기 때문에 Wideroe라는 저가항공을 타서 이동했고, 베르겐에서 오슬로 구간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 구간으로 꼽힌다고 해서 기차를 탔다. 물론 눈 때문에 초반 구간이 닫히는 바람에 베르겐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 반 가량 이동해서 거기서부터 기차를 타고 이동해야했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엔, 초반에는 너무 창밖에 까맣거나(해는 오전 10시쯤에야 뜬다) 하얘서(눈이 온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생각만큼 인상적이진 않았다. 그리고 대자연이 펼쳐지기 시작했을 땐 이미 5시간 이상 이동 중인 상태여서 기차에서 빨리 내리고픈 마음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이나 해가 좀 일찍 뜨기 시작할 때는 비행기 대신 기차를 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이동이 많은 여행을 했다. 매번 다음 여행에서는 한 곳에만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처음 가 본 곳에 모든 걸 다 걸어버리기엔 연차 자체도 아깝지만 일을 쉬고 휴가를 내는 것 자체도 어렵기 때문에 여기저기 각기 다른 곳에 각기 다른 기대를 가지고 찾아 갔다. 만약 누군가와 함께 간다면 비행기로 이동할 필요는 없도록 한 곳에 머무는 게 더 좋을 것 같지만 혼자 가는 여행이었기때문에 혼자 가서 생길 수 있는 여러 변수들을 보다 미리 까다롭게 생각하고 가게 되니까 더욱 그랬다.

 

여행은 꽤 길었고, 다녀오자마자 짐을 풀고 출근하느라 한동안 체력 방진에 시달리긴 했지만, 겨울 속에 파묻혀서 지낸 열흘 동안 잘 쉬었다. 특히 트롬소에서는 정오를 앞뒤로 3~4시간 정도 해가 어스름한 정도에 머무는 극야여서 오랜만에 씨에스타를 하는 아주 느린 템포로 하루를 보냈다.